양평의 자연을 그리는 ‘양평블루스’ 화가 집단을 이끄는 정일영 작가
-풍경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간다.
양평 사나사계곡. 10여 명의 화가가 계곡의 풍경을 화폭에 담고 있다. 밀레, 고흐 이후 화가들이 자연을 마주하고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오랜만에 본다. 2022년 겨울부터 양평의 화가 집단 ‘양평블루스’는 계절마다 한 장소를 골라 스케치부터 채색까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모임을 이끄는 정일영 작가(서양화. 1964~)를 만나봤다.
정일영은 충북 영동 황간 출신이다. 그야말로 그림같은 월류봉과 월유정이란 절경이 있는 곳이다(그의 화실에도 이곳을 그림 그림이 있다). 정일영은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 수업을 받았다. 학교에서 크레용이 아닌 물감을 사주고, 소사 아저씨가 이젤을 만들어 주었다. 중학교까지는 화가의 꿈을 키웠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절로 들어가면서 그림을 접었다. 정일영이 다시 그림을 그린 것은 서른이란 나이에 서울대 서양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다.
정일영에게 자연은 늘 중요한 그림의 주제였다. 지난 30년간 정일영에게 자연은 몇 번 모습을 바꾸며 다가왔다.
밤과 낮의 구분이 없는 지하 방에서 보낸 20대. 밤거리의 네온사인이 위안이 되던 경험에서 그의 그림 속 형상들은 네온사인이 하나의 화소가 되어 건물이 되고 나무가 됐다.
오래전에 지은 아파트에 살던 시기에는 아파트 주변의 숲을 이루는 큰 나무들에게 집중했다. “나무도 그림을 그리는 나(작가)를 인식하고 있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이 그 자체가 존재로서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도교수였던 서용선(1951~)이 주도하던 할아텍(HAL Art & Technology)의 멤버가되어 강원도 태백의 철암 탄광촌에 매월 그림을 그리러 가던 경험들. 정일영에게 자연의 의미를 더욱 깊게 다가왔다.
“자연을 보고 있으면 그리고자 하는 의욕이 사라질 때가 자주 있다. 아무 일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싶을 뿐이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지금 이러한 체험들이 과연 그림에 담을 수 있을까?”
정일영은 자연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자연이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존재적 근원’이 라는 환경신학도 공부했다. 어쩌면 ‘종교적 풍경화’도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가능성을 생각했다.
정일영은 스케치 단계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자연에서 그림을 그린다. 자연의 모든 형상을 명료하게 눈에 담기위해 빛의 산란이 적은 흐린날 그림을 그리는 것을 선호한다. 독특하게 붉은색과 파란색으로 스케치를 한 다음, 그 위에 자연의 형상들을 그려간다. 정일영의 그림 속 하늘과 물에 붉은색이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 붉은색은 사물의 원소가 지닌 정신과 생명력, 그리고 그 힘의 흐름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림의 터치 하나하나는 기계적하지 않으려고 실물 자연을 보면서 그 순간 느낀대로 하려고 노력한다. 그의 그림과 그가 그리는 자연을 동시에 본 사람들이 ‘그림이 실물보다 더 생생하다’고 느끼는 이유다.
그가 자연에서 작업을 하는 것을 보면서 지난겨울부터 하나둘씩 늘기 시작한 동료 작가들이 어느덧 1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모임이 만들어지고, 매주 화요일은 의무적으로 함께 그리자는 회칙도 정해졌다. 그것이 ‘양평블루스’가 된 것이다.
전업 작가들이 단체로 야외에 나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서로에게 위로도 받지만, 냉정한 평가도 동시에 받는다. 스케치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허세가 통하지 않는다. 작업을 하는 열정과 태도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래서 작가로서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언제부턴가 풍경화는 상대적으로 ‘열등하다’는 인식도 있다. 이런 도식적인 미술 사조에서 벗어나고자 자연을 마주하고 진지하게 풍경화를 그려 왔다. 정일영과 양평블루스가 인상파 이후 풍경화의 새로운 전범을 만들어갈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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